기독교의 중심 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종종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그의 가르침과 사명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어떻게 자주 잘못 해석되고 그분의 말씀이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신약성경의 몇 가지 중요한 예입니다.
소개
XNUMX년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고,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의 출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인물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미약한 시작에서 오셨고, 예상치 못한 교제를 유지하셨으며, 로마에 맞서 지상 혁명을 시작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는 반대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오해를 받고, 잘못 전해지고, 거짓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조차도 종종 그분의 가르침의 요점을 완전히 놓쳤습니다.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그분에게 거짓된 동기를 부여하는 예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오해를 받았는지에 대한 예를 살펴보면 현대 독자들이 그분이 가르치신 심오한 진리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사람들이 가졌던 잘못된 가정과 관점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선입견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주요 집 약 :
- 예수님은 지상 생애 동안 자주 오해를 받고 잘못 표현되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예언된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종종 그분의 말과 행동을 왜곡하여 그분을 거짓으로 비난했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때때로 그분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한 사례를 살펴보면 현대 독자들이 그분의 정체성과 가르침에 대해 더 깊은 통찰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기원은 오해되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겸손한 시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가 예루살렘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특권과 권세를 갖고 탄생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젊은 농부 여인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과소평가하거나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고에니라. (미가 5:2)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예루살렘 학자들은 예언이 베들레헴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미가서 5장 2절을 참조해야 했습니다(마 2:1-6). 사람들은 이 중요하지 않은 도시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유대인 메시아의 탄생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모호한 혈통은 또한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을 때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담대한 가르침에 동네 사람들이 불쾌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목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조롱했습니다(마 13:53-57).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을 알았지만 그분을 특별한 사람이나 권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 나다나엘도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의심을 표시했습니다. 나다나엘은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요한복음 1:43-46) 나사렛은 메시아가 탄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하찮고 평판이 좋지 않은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예는 사람들의 세상적인 관점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어떻게 눈멀게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다르게 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시작하셨다고 해서 예수께서 메시아가 되실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연합하시는 것을 오해하시다
종교 엘리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연합하기로 한 예수의 선택에 큰 분노를 느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 창녀, 그 밖에 불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함께 계시다고 비난했습니다(막 2:13-17, 눅 15:1-2). 그들은 의로운 교사라면 그러한 부도덕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막 2:13-17).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께서 죄인들과 교제하신 것은 랍비로서의 그분의 신뢰도를 약화시켰고 그분이 죄악된 행위를 용인하신 것으로 추론했습니다.
레위와 같은 세금 징수원은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 백성을 강탈하는 반역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레위의 평판이 나쁜 직업을 간과하시고 그에게 인생을 바꾸는 구원을 제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품으신 것은 죄 자체를 용인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죄를 묵인하신다고 비난함으로써,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부족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것보다 규례와 관습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베드로후서 2:3). 예수님은 죄인에게 구원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예수의 주장은 왜곡되고 정죄되었다
예수께서는 반대자들의 소중한 전통을 반대하고 모세 율법을 재해석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반대자들의 분노를 자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시고(막 7:14-23), 죄를 용서하시고(눅 5:20-26),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을 때(막 3:1-6), 바리새인들은 그분이 능력을 주장하신다는 이유로 그분을 신성모독죄로 비난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분의 말과 행동을 오만하고 정죄받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내가 네게 말하는데, 일어나 네 자리를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2:10-11)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셨을 때 율법교사들도 분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1:12-1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옳을 수 있는지 묻기보다는 즉시 신성한 권위로 말하고 행하신 그분을 죽일 방법을 모색했습니다(막 11:17-18).
이러한 예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보다는 의심과 적대감의 렌즈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예수의 신성한 신분이 드러날 때에도 그분을 약화시키고 멸망시키려는 노력이 촉발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사회적 규범을 따르기를 꺼리셨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사회의 주류 기대와 충돌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습과 예절에 접근하셨습니다. 그는 관찰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여성, 이방인, 어린이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예수께서 하신 행동은 잘못된 인상과 비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성 컬렉션 – 예수님은 여성들과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여성 추종자들의 지지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지위를 높임으로써 여성을 소외시키는 뿌리 깊은 문화적 태도에 맞서셨습니다. 그의 행동은 경멸과 거짓 판단을 가져왔습니다.
죄 많은 여자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 바리새인 시몬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여자가 누구며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는 죄인인 줄을 알았느니라.” (누가복음 7:39)
시몬은 그 여자와 예수를 전통적인 사회 기준으로 가혹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는 명예와 가치에 대한 세상적인 개념을 뒤집는 하나님의 왕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 – 갈릴리로 가던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실 때, 예수님은 관례를 무시하시고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기 위해 멈추셨습니다(요한복음 4:1-42).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으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사마리아인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시겠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모든 배경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놓쳤습니다.
어린이 –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면서 아이들은 하찮은 존재이므로 그분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안수해 달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분개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결단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0:13-15)
이러한 예는 사람들의 고유한 존엄성과 가치를 드러내는 예수의 행동이 뿌리 깊은 편견 및 위계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사회 통념에 순응함으로써 때때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분의 메시야 사명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로서의 그분의 정체성과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상 왕국을 세우기 위해 혁명을 주도하기보다는 고난을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는 베드로의 시도는 이러한 오해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자 칼을 갖고 있던 시몬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오른쪽 귀를 잘랐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칼을 거두어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복음 18:10-11)
예수님의 죽음 이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절망감을 표현했습니다(누가복음 24:13-24).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실 것인지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그러면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6-8)
이러한 예는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기대를 넘어서 전 세계를 위한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이해하려는 제자들의 투쟁을 보여줍니다.
결론
복음서 기록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제한된 관점과 의제의 렌즈를 통해 예수님을 해석하고 응답한 사례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그분의 행동과 주장은 회의론, 공격, 신성모독 혐의, 그분의 신뢰성을 훼손하려는 노력, 심지어 그분에 대한 폭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매우 다른 것을 기대했을 때에도 예수님은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얼마나 온전히 성취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소외되고 도전받는 사회적 관습이 하나님의 가치와 상충될 때 자비롭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는 종교계의 분노를 샀을 때에도 하느님의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항상 그분의 진정한 목적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그들의 여정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희망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오해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에 오해가 있는지 겸손하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잘못 해석한 다른 사람들의 예를 깊이 생각해 보면 현대 추종자들이 단지 우리 자신의 가정과 의제보다는 성경적 렌즈를 통해 그분을 보도록 강요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왜곡했는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맞게 주님을 왜곡하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고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더 깊게 해달라고 성령께 간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연구하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오해를 받으신 성경의 예를 통해 우리는 더 정확한 관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